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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립자 모삼열 목사
  • 교회 창립 97주년 기념 임순만 교수 초청 강연
  • 사랑과 평등을 실천한 S.F. Moore
임순만 교수본 고는 지난 1990년 6월 17일 창립97주년 기념행사의 하나로 거행된 "임순만 박사 초청 강연회"의 말씀을 승동지 편집부에서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연대순으로 재편집한 것이다.    임순만 박사는 1953년 연세대를 졸업하시고, 콜롬비아대학에서 종교학을 전공하시고 드류대학에서 종교 사회학 박사학위를 취득하셨다.    그 후 뉴욕주립대에서 종교사회학 교수로 재직중에 본 강연회에 오셨는데, 1973년부터 "동양 천민에 대한 연구"의 일환으로 S.F.Moore의 연구를 진행하고 계셨었다.
 

먼저 교우들을 뵙게 되어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저는 복중에서부터 승동교회와 인연이 있는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승동교회 제8대 당회장을 역임하신 故 김익두 목사님께서 저의 어머니께서 다니시던 평양 밖의 탄포리교회에 오셨을 때 저는 어머님의 복중에서 기도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무어 목사님에 관하여 아는 대로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무어 목사님의 본명은 사무엘 포먼 무어 (Sammuel Forman Moore)이고 한국명은 모삼열(牟三悅)입니다. 소가 운다는 의미의 '牟'씨 성을 본인은 매우 좋아한 듯싶습니다.

무어 목사님은 시카고에서 조금 떨어진 그랜드 릿지에서 1860년 출생하셨고 4살 위의 누님과 2살 위의 형님이 계셨습니다.아래로는 동생이 있고 아버님은 목사님이었고 형님도 목사님이 되었으며 동생은 장로님이 되셨습니다. 어려서 사도바울과 같은 극적인 소명 체험은 없었지만 열두살때 산에서 기도하던 중 '이방인을 위해 몸을 바치겠다'는 헌신을 다짐했다고 합니다.

그 후 미국 서부의 몬타나 대학(Montana college)을 졸업하고 1889년 맥코믹 신학교에 입학하여 1892년 봄 졸업하였습니다. 그 해 7월에 사모님과 결혼하고 9월 22일 한국에 오게 되었습니다.

무어 목사님은 대학시절부터 남다른 소명의식을 가지고 살았는데 몬타타대학에 다닐 때는 학교 근처에 있는 감옥소의 죄수들을 회개시켜 훌륭한 장로교인을 만들었고 맥코믹 신학교 시절에도 두 곳의 경찰서를 자주 방문하여 유치장의 죄수들을 회개시키고 위로하는 생활을 하였습니다.

무어 목사님은 1892년 9월에 한국에 오셔서 선교사들이 주로 살고 있는 정동이나 연동과는 떨어져 있는 한국인 마을에서 한국인들과 함께 어울려 살았습니다.

말을 배우는 재주도 비상하여 한국에 온지 수개월 만에 주기도문을 드리고 기도를 할 수 있었습니다.

그가 3.4년 후에 수원에서 우리말로 설교를 마치자 한 노인이 "무어 목사님, 미국 사람도 한국말을 씁니까 ?얼마나 말씀을 잘하시는지 한국 사람이 양복만 입은 것 같습니다"라고 칭찬을 하였다고 합니다.

또 한국인과 함께 어울려 살면서 말을 배웠기에 그의 말은 순수한 보통사람, 곧 서민층의 생활언어를 그대로 사용하였습니다.

우스운 이야기 한 가지는 우리 말을 그렇게 잘하는 무어 목사님이 선교사회에서 치루는 ‘한국어 시험’에는 늘 낙제 점수를 받았다는 것입니다.왜냐하면 '한국어 시험'은 '유식한 말'들을 묻기 때문이었습니다.

무어 목사님은 이 문제에 대하여 "나는 무슨 기독교서적 운동을 하려고 하지 않습니다.다만 실제로 복음을 이 백성들에게 직접 주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 합니다"라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이러한 목사님의 태도는 한국 사람들에게 매우 깊은 인상을 주었습니다. 그래서 그의 집은 항상 사람들로 붐볐고 또 조그만 틈만 있어도 계속 복음을 들고 노방 전도를 나가기에 바빴습니다.

한국 사람들은 믿는 사람이건 믿지 않는 사람이건 간에 그분을 가리켜 仁牧이라 불렀고 그의 집을 '仁義禮之家'라고 칭송했습니다.

무어 목사님은 한국에 오신 그 이듬해인 1893년에 곤당골에서 예수교학당과 교회를 시작하셨는데 이 교회가 오늘 우리 승동교회의 모체가 됩니다.

그 분은 교회 대지 구입을 위해 손수 60달라의 헌금을 내놓으셨습니다.

이제 무어 목사님과 백정들 간에 있었던 유명한 일화를 소개하겠습니다.

1893년 무어 목사님이 예수교학당을 시작한지 얼마쯤 지난 후에 무어 목사님이 손수 복음을 들고 길에서 전도하면서 '아이들을 예수교학당에 보내라'고 권하고 있었습니다.

마침 그 말을 박성춘이라는 백정이 듣고는 그 아들 봉출이를 학당에 보냈습니다.그 이듬해(1894)로 짐작되는데 박성춘이 발진티푸스에 걸렸습니다.박성춘은 당시의 치료법에 따라 구들에 불을 많이 때고 땀을 흘리며 굿을 했지만 병은 전혀 차도가 없었습니다.그러던 어느 날 학당에 갔던 봉출이가 무어 목사님과 함께 당시 고종 황제의 어의였던 애비슨(O.R. Avison) 선교사를 모시고 왔습니다.

애비슨 선교사의 정성스런 양침 주사와 무어 목사님의 기도로 며칠 후에 박성춘은 완쾌되었습니다.그리고 애비슨 의사가 고종황제의 어의라는 사실에 깜짝 놀랐습니다."어떻게 하늘 같은 고종황제의 의사가 나 같은 천민을 치료해 줄 수 있는가 ?"하고 생각이 들자 그만 너무 감격하고 말았습니다.그때 봉출이가 "아버지 교회에 가세요"하고 졸라대자 결심하고는 교회에 등록을 했습니다.드디어 1895년 5월 박성춘은 세례를 받고 정식으로 입교를 했습니다.그러자 일이 터졌습니다.양반 교우들이 하나 같이 교회를 나오지를 않는 것입니다.당시는 교우들이 겨우 40~50명에 불가하던 시절이기 때문에 교회가 텅 빈 것 같았습니다.그러자 무어 목사님은 이주사라는 양반 교우를 붙들고, "왜, 양반들이 안 나옵니까?무슨 일이 있습니까?""아니, 선교사님은 이런 일이 일어날 줄을 모르셨습니까?", "....?" "선교사님, 우리가 예수는 믿어요, 하지만 어떻게 백정들과 함께 예배를 본단 말입니까?""이보시오, 이주사님, 우리는 하나님께로부터 나온 한 하나님의 자녀들인데 함께 예배를 볼 수 없다는 것이 웬 말입니까?"그러자 이주사는 고함을 치면서 나가버렸습니다.백정 박성춘은 풀이 죽어 아무 말도 못하고 있었습니다.그때 무어 목사님은 "예수 사랑하심은"이라는 찬송을 계속하여 부르셨습니다.그리고 백정들을 위로하셨습니다.결국 남은 것은 6명의 백정뿐이었습니다.

며칠 후 박성춘 교우가 4명의 백정과 그들의 부인들을 더 데려 왔습니다.무어 목사님은 이 시련을 기도로 넘어 가려고 애쓰셨습니다.그로부터 한 달쯤 지난 어느 날 신씨라는 양반이 찾아와서 "선교사님 백정들은 뒤에 앉고 저희 양반들은 앞에 따로 앉게 해주시면 우리가 다시 교회에 나오겠습니다"고 말하였습니다.그러나 무어 목사님은 이것을 거절하셨습니다.외로운 백정들 편에 서신 것입니다.소외 계층과 함께 고통의 십자가를 지기로 결심하셨던 것입니다.이것이 무어 목사님의 위대한 점인 것입니다.이렇게 하여 '첩장교회', '백정교회'인 승동교회가 쓰러지지 않고 우뚝 선 것입니다.

그 후 목사님은 백정들의 고충을 자세히 듣고는 이미 지난해(1894) 갑오경장때 법제적으로는 혁파되었으나 실제적으로는 남아 있는 천민들의 차별 철폐를 위해 조정에 탄원서를 내기로 하였습니다.그리하여 1895년과 1896년 봄까지 세 차례에 걸쳐 內部에 탄원서(所志)를 냈습니다.

그 내용은,"우리 백정들 모두가 갓과 두루마기를 쓰게 해 주십시오"라는 것이었습니다.당시 고종황제의 어의였던 애비슨 의사와 일본공사 이노우에(井上)도 함께 도움을 청했습니다.마침내, "이미 법령이 공포되었는데 어찌 너희들의 청원을 거절하랴?"라는 內部의 대답이 내려졌고 전국에 방을 부치도록 허락했습니다.이러한 결과는 무어 목사님, 애비슨 선교사, 박성춘 교우의 노력의 대가였습니다.이후 박성춘 교우는 무어 목사님에게 큰 힘이 되었고 전국을 돌아 다니며 백정들을 중심으로 복음을 전했습니다.

또 1898년 만민공동회가 종로 네거리에서 열렸는데 양반, 중인, 상민, 천민은 물론이고 학생, 부녀자, 장님을 포함한 모든 계층의 사람들이 모였습니다.이때 윤치호 선생이 인사말을 하고 첫번째 연사로 박성춘 교우가 등단하여 애국애족을 외치는 감격적인 연설을 했습니다.박성춘 교우는 드디어 1911년에 승동교회 장로가 되었습니다.그의 주도적인 역할로 보면 더 일찍 장로가 될 수도 있었을 텐데, “백정이 어떻게 장로가 되는가?”라고 하는 반대하는 이들 때문에 다소 늦어졌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또, 그 아들 봉출이는 매우 총명하여 예수교학당과 경신학교를 졸업한 후 1908년 세브란스 의전 1회 졸업생이 되어 한국인 최초의 의사가 되었습니다.그는 고종황제의 악성 종기를 치료하여 고종황제로부터 "너는 정말 박사로구나 !"라는 칭찬을 들었다고 합니다.

이처럼 무어 목사님은, 모든 사람은 하나님이 지었으므로 평등하고 똑 같은 인권을 가졌다는 성경 중심의 복음 실천자였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고매하고 선지자적인 그의 행보는 칭찬은 커녕 오히려 많은 선교사들의 불평을 샀습니다.예를 들면 당시 서울의 몇몇 선교사들은 "교회가 백정들의 것으로 소문이 나서 양반들에게 전도를 할 수가 없다"고 하는가 하면, 또 어떤 이는 "무어 목사는 백정 해방운동을 위해 탄원서를 냈다"고 헐뜯기도 했습니다.

특히 알렌(A.N,Allen) 공사와 가장 갈등이 심했습니다.

알렌 공사는 1884년 중국에 의료선교사로 파송되었다가 그곳에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미국 선교본부에 “한국에 가도록 해달라”고 청원하여 미국 공관에 거주하는 의료원으로 한국에 온 사람입니다.

그는 한국에서 고종황제의 신임을 얻었는데, 총상을 입은 정부 고관을 치료해 주고 고종황제의 신임을 얻었습니다. 그 후 1885년 4월 언더우드와 아펜젤러가 선교사로 입국하게 되자 선교사 직책을 내놓고 공사가 된 정치적인 분입니다.성격이 매우 괴팍하기로 소문이 나 있었습니다.

이러한 알렌에게 무어 목사님은 순진하게도 "나를 궁중에 들여보내주면 황제에게 전도하겠소"하고 제의를 했습니다. 물론 알렌은 펄쩍 뛰면서 화를 냈습니다. 그러자 무어 목사님은 단념하지 아니하고 고종황제께 편지를 써서 우체통에 넣었습니다. 이것은 아마도 미국사회의 관습이 한국에서도 통용될 것이라고 믿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자 그 편지는 고종황제에게 가지 않고 알렌의 손으로 들어가고 말았습니다.그러자 알렌은 크게 화를 내면서 "서울에 있는 선교사들은 모두 훌륭다. 그러나 몇몇 사람은 다루기가 매우 어렵다. 특히 빈톤과 무어가 더욱 어렵다. 그 중에도 무어는 걷잡을 수가 없다"고 말하고는 미국 국무성에 편지를 냈습니다. 그 편지 중에서 알렌은 "백정에서 황제라니 도약도 너무 지나친 도약(great leap)이 아닌가?"라고 흥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제가 국무성에서 입수한 무어 목사님의 편지는 다음과 같습니다.

"나 사무엘 무어는 미국의 시민으로서 하늘과 땅을 지으신 하나님으로부터 사명을 받아 주의 복음을 전하는 사람입니다. 만약에 황제 폐하께서 폐하의 신하들과 더불어 이 말씀을 듣기를 원하시면 저를 불러주시기를 바라옵니다.”
- 존경하옵는 황제폐하께, Sammuel Moore

어떻습니까. 이것이 못할 말이며 쌍스런 말입니까 ?

알렌의 눈에는 도약이 심했겠지만 아마도 하나님과 무어 목사님의 눈에는 결코 백정으로부터 황제까지의 도약이 아니었을 것입니다.다같이 죄인일 뿐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일을 계기로 무어 목사님과 알렌 공사 사이는 급격하게 악화되었습니다.알렌은 무어 목사님을 공관의 영창에 집어 넣고, 또 입국 비자도 회수해 버리겠다고 협박했습니다.그것도 모자라서 알렌은 1901년 가을 평양에서 열린 선교사들의 연례회의에 편지를 내서 "무어 목사는 미국 시민으로서 정부의 말을 그대로 따르고 전하도록 하라"는 성명을 발표할 것을 선교사들에게 요구했습니다.그러자 선교사들은 "무어가 다시는 안 그러겠다"고 약속했다는 내용의 성명서를 만들어 알렌에게 보냈습니다.무어 목사님은 심한 갈등을 겪었지만 "내가 하나의 인간으로서, 미국 시민으로서 누릴 수 있는 권리에 대해서 너무 추상적인 개념에 가득해서 그 동안 당신에게 실례가 많았습니다.내가 잘못했고 앞으로는 당신의 말을 듣겠습니다"는 내용의 서약서를 정식으로 알렌에게 보냈습니다.

그리고 며칠 후 미국 해외 선교본부 총무인 엘라우드에게 보낸 편지에서 "내가 누구도 미워해서는 안되지만 너무 너무 참을 수 없어서 한 두어 주일 동안 나쁜 마음을 품고 지냈습니다.그러자 누군가 내 뒤에서 기도하고 계신 것 같았습니다.이제는 그를 용서할 수 있고, 또 내 마음의 안정도 얻을 수 있게 되어 하나님께 감사 합니다"라고 쓰고 있습니다.

이러한 와중에 아내의 폐결핵이 점차 심해져서 1902년에서 1903년까지 미국의 유타주와 사우스 캘리포니아에서 휴양을 하고 돌아왔습니다.

이때 그는 서울 벗어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조그만 배를 하나 만들어 기쁜소식(Glad-tidings)이라고 이름을 붙이고 황해도 白川에 갔을 때였습니다. 당시 일본인들이 경의선 철도를 부설하면서 한국인들의 노동력을 강제로 수탈하고 있었습니다.농번기에도 그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한국인 장정들을 강제로 끌어다 일을 시켰고 가축을 마구 잡아갔지만 임금을 주거나 가축의 값을 쳐 주지 않았습니다.뿐만 아니라 일에 나오지 않는다 하여 한국인들을 잡아다 때리고 감옥에 넣기도 하였습니다.너무 화가 난 무어 목사님은 이 일을 조사하려고 하였습니다.그러자 알렌 공사는 또다시 이 일을 트집 잡고"너는 한국인에게 너무 너무...,그러지 말고 복음이나 전하라"고 힐책했습니다.이에 대하여 무어 목사님은 "내가 미국시민으로서 못할 일이 무엇이 있소"라고 대꾸하고는 일본 공사를 찾아 갔습니다."한국인들을 데려다가 일을 시켰으면 임금을 주어야지 임금도 주지 않고 때리다니 도대체 이게 무슨 일입니까?"라고 대 들었습니다.그리고 농촌에 대한 일본의 수탈 상황을 조사하여 미국 신문에 여러 차례에 걸쳐 기고를 하였습니다.무어 목사님은 정말 대단한 용기를 보여 주었습니다.

1906년 5월 무어 목사님은 평양 신학교에서 구약과 영국 역사를 가르쳤습니다.그는 본래 구약연구에 정통하였고 라틴어와 히브리어는 매우 익숙한 사람입니다.

무어 목사님은 영국 역사 중에서도 찰스 대제와 의회와의 갈등을 중심으로 영국의회 민주주의를 가르쳤습니다."내가 이것을 가르치면 한국에 의회 민주주의가 실현되기를 암시하는 것인데 한국 조정에서 싫어하는 것이 아닌가.그러나 우리 목사들이 이러한 의회정치와 민주주의(Democracy)를 가르친다면 한국의 장래는 과연 어찌될 것인가?" 라는 글을 남겼습니다.그는 결국 이 땅에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하여 인권이 존중되는 민주주의 사회가 건설되기를 소망하였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렇게 훌륭하신 무어 목사님도 이 땅의 생을 끝낼 때가 왔습니다.그는 1906년 12월 18일에 세브란스 병원에서 발진티푸스로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그러자 수 많은 백정들이 연못골에 있는 목사님 집에 모여들었습니다. 그리고 사모님의 요청에 따라 백정 20명과 경신학교 학생 20명이 세브란스 병원에서 목사님의 시신을 옮겨왔습니다. 그리고는 동네부인들이 정성껏 장식한 관에 목사님을 모시고 우리말로 정성껏 장례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리고 나자 경신학교 학생들이 목사님을 운구하고 정동교회에서 다시 예배를 드리고 양화진의 선교사 묘역까지 찬송가를 부르면서 도보로 운구하여 갔습니다.

한편 백정들은 자기들의 슬픔과 아쉬움을 억제할 길이 없어 '聖者'로 모시려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당시 천주교회의 예를 따르려고 했던 것 같습니다.그 이듬해(1907) 사모님은 복중에 있던 엘리자베스를 출산하신 후에 아이들(3남1녀)를 데리고 미국으로 돌아가셨습니다.돌아가신 후 너무 가난하여 선교본부에 구제를 요청했으나 별 도움을 받지 못했고, 사모님의 심한 폐결핵과 가난으로 결국 장남 존과 차남 데어 퍼리스트는 뉴헤이븐에 있는 친지 집으로 보내졌고, 엘리자베스는 어려서 죽었습니다.

사모님은 폐결핵 요양소에서 고통스런 생활을 하면서도 복음을 전하고 사랑을 베푸시다가 1923년 5월 29일 뉴욕 북부의 캐스달 뉴욕 요양소에서 세상을 떠났습니다.

지금까지 말씀 드린 것이 승동교회의 초대 당회장이시며 말씀을 몸으로 실천하셨던 위대한 선교사 무어 목사님에 관한 것입니다.

이제 그의 신학사상을 잠깐 살펴보고 끝을 맺도록 하겠습니다,

제가 지금까지 추적하고 연구한 바로는 무어 목사님이 무슨 특별한 혁명적인 생각을 가졌거나 新신학의 사회복음주의 영향을 받은 것이 아닙니다.

또 그 분이 졸업하신 1892년경의 맥코믹의 신학은 전통적인 보수신앙으로 무엇이나 하나님 말씀으로 가르치고 살려고 애쓰던 시기였습니다.

그러므로 그분이 천민의 차별철폐와 사회 정의를 부르짖게 된 것은 어떤 신학의 영향 때문이 아니요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르친 말씀을 그대로 실천하려다 보니 그렇게 된 것이라고 봅니다.다시 말씀 드리면, 다만 말씀대로 살려고 하셨을 뿐입니다.그러나 이것이 그의 위대한 점인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