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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역대 당회장] [7대 이재형 목사] 이씨 조선의 왕손으로 목사가 된 이재형 대감
글쓴이 관리자  (203.244.212.22)
날짜 2018-03-22
조회수 1466

이씨 조선의 왕손으로 목사가 된 이재형 대감

  

함성택의 <한국 개신교 초기 인물열전-조선신도 편(8)>

이씨 조선의 왕손으로 목사가 된 이재형 대감

한국 초대 개신교가 주로 서민들인 소외계층을 중심으로 전파되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지만 교회 지도자들 가운데는 쇠락해가는 나라의 장래를 걱정하는 젊은 관료들이나 뜻을 이루지 못한 선비들을 비롯해서 상류층 귀족들이 적지 않았던 것도 사실이다.
양반과 쌍놈의 구별이 분명하고 사농공상의 신분이 엄격했던 이씨조선 에서 분명 새롭고 혁신적인 현상이 아닐 수 없다.
그 가운데 이씨 조선의 왕손으로 마부꾼 엄영수(당시 선교사나 목사를 돕는 사람을 영수라 불렀다)의 전도로 왕족으로는 처음으로 예수를 믿기로 결심하고 목사까지 된 이재형의 이야기는 한국개신교 역사의 한 감동적인 에피소드가 아닐 수 없다.

철종대왕의 사촌인 경평군의 첫째 아들인 이재형은 영조의 현손 흥선대원군의 둘째 아들로 왕위에 오른 고종보다는 왕위계승권의 순위로 보면 한 수 앞서서, 비슷한 때에 태어났다면 의당 왕이 되었겠지만 1863년 고종이 12세로 왕위에 오를 때 는 태어나지도 않았기 때문에 결국은 왕이 될 수도 있었던 왕손으로 그치고 말았다.

1871년 현 승동교회 뒤에 있는 승동대감댁에서 태어난 재형은 태어나자 대궐안으로 불려가 그곳에서 자라면서 고종의 아들 순종과 후에 대한민국의 부통령이 된 이시영과 같이 대궐 학교에서 공부하였다. 26세에 과거에 합격하자 고종은 그를 경상도의 풍기군수직에 임명하였다.

그러나 왜인들이 들어와 득세하며 쇠약해지는 왕실을 보면서 울분을 참지못하여 군수자리를 내놓은 왕손은 어떻게 처신해야할지 알지 못했다. 그러다가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되자 “나는 왕손의 특혜를 깨끗이 포기한다”고 선언하고 왕손에게 주어지는 모든 특혜를 다 포기해 버리고 자유로운 평민이 되었다.

“나비야 청산가자, 범나비 너도 가자. 가다가 저물거든 , 꽃에 들어 자고가자. 꽃에서 푸대접하거든 , 잎에서나 자고 가자”는 청구영언의 시를 좋아했던 이재형은 어쩌면 풍운아였는지도 모른다. 그는 가지고 있던 200석 땅문서를 아내에게 넘겨주고 나머지 재산을 정리하여 방랑길을 떠났다. 그래도 왕손이었기에 한동안 남에게 신세를 지지않고 방랑하며 자유롭게 지낼수 있었다.

이재형은 방랑생활을 하면서도 가을이면 충주선영을 찾아 성묘를 하곤 하였는데 1904년 노일전쟁이 끝나던 해 우연한 기회에 엄귀현이라는 마부꾼을 성묘길에서 만났다. 성묘길에서 이재형 왕손을 모시게된 그는 그를 “나으리, 나으리”하며 정성으로 모셨다. 여행길에 친숙해진 그는 대담하게 왕손에게 전도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그는 두려운 마음이 없지 않았으나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나으리, 황송하오나 오늘부터 예수를 믿으소서!” 하고 한마디씩 던지곤 하였다. 그러던 어느날 그는 “하나님은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누구든지 그를 믿으면 영생을 얻으리라 했습니다. 나으리도 예수를 믿으면 죄사함을 받고 영생을 얻을 수 있습니다.”고 권면하는 것이었다.

이재형은 마부꾼의 건방진 태도가 괘씸하기도 하여 “건방진 소리 하지말고 말이나 잘 몰거라”하고 핀잔을 주기도 했지만 이 마부꾼의 진정한 호소와 용기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시대가 변하면서 서양선교사들과 서양문화에 관한 이야기를 듣기는 했지만, 이 마부꾼의 이야기는 이해할 수 없었다. 이 대감은 빈정대는 투로 “예수를 믿으면 마부꾼 신세도 면하는가”고 물었다. 그러자 마부꾼 엄영수는 “나리, 예수를 믿는것은 그런 도리가 아닙니다. 저는 마부꾼 신세를 면하려고 믿는 것이 아니라 마부꾼 노릇을 더 잘하려고 믿습니다.”고 대답하였다. 그러면서 “나리, 나리께서 예수를 믿으시면 제가 평생을 마부꾼으로 나으리를 모시겠습니다”고 하였다. 이재형은 이말에 놀라는 한편 예수에 관한 호기심이 생겼다. 그는 “기독교가 그렇게 좋은 것인가?”하는 의문과 함께 예수에 관한 것들을 더 묻게 되었다. 시간이 지나며 그는 예수에 관해 더욱 생각하게 되었고 마부꾼 엄영수를 잊을 수 없었다.

이재형도 몇 해가 지나고나니 친구들의 신세를 지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러한 사정을 전해들은 부인이 사람을 보내어 “나에게 주고간 200지기를 잘 늘여서 지금 500지기가 되어 먹고살만하니 들어오십시오"하고 독촉하여 집에 돌아왔다. 이때 부인 정씨는 500석지기 부자가 되었을뿐 아니라 승동교회의 교인이 되어 있었다.

1907년 원산에서 시작된 부흥운동이 평양을 거쳐 전국적으로 번져가던때 마침 승동교회에서 부흥사경회가 열렸다. 부인 정씨의 권고를 받아들여 부흥회에 참석한 이재형은 그곳에서 자신에게 처음으로 예수를 전해준 신앙의 선배 마부꾼 엄영수을 만났다. 이왕손은 “내가 교회밖에서는 왕손이지만, 교회안에서는 그리스도안에서 한 형제일 뿐이다”라고 하면서 서민 마부꾼 엄영수를 ‘형님’이라고 부르며 깎듯이 모셨다고 한다.

이재형이 예수를 믿기로 결심한 때는 1907년 그의 나이 38세 되던 해였다. 헤이그 밀사사건으로 고종황제가 왕위에서 물러나고 순종이 즉위한 해이다. 왕손의 특권만이 아니라 이제부터는 왕손의 지위마저 내려놓기로 결심했던 것이다. 그리고 예수를 믿고 일평생 남을 위하여 살다가 고요히 죽자고 결심했다. 그리하여 이재형 목사는 왕손으로서 예수를 믿은 최초의 인물이 되었는데 그것은 마부꾼 엄영수가 뿌린 전도의 씨앗이 뿌리를 내리고 부인 정씨의 간절한 기도가 상달된 결과였다.

조용히 어려운 사람들을 도우며 헌금을 가장 많이 내는 성도로 알려진 이재형 대감은 1914년 승동교회의 장로가 되었고 4년 후인 1918년에는 평양신학교를 졸업하고 목사안수를 받았다. 목사안수를 받은후 경기도 양평지구에서 4교회를 순회목회하던 가운데 1921년 호레이스 알렌 선교사가 제중병원에 세운 현 남대문 교회의 2대 목사로 청빙받았다. 1924년부터 1933년까지는 승동교회 담임목사로 시무하였으며 1947년 77세로 세상을 떠났다.

평생을 무보수로 목회하면서 가난한 학생들에게 학비를 대어주고 유능한 젊은이들을 유학갈 수 있도록 도와준 이재형 목사는 “남에게 주면서 사는 것처럼 행복한 일이 어디 있으며, 남에게 받으며 사는 것처럼 불쌍한 일이 어디 있는가?”라면서 ‘대접받는’ 생활을 기꺼히 포기하고 항상 주님의 사랑을 ‘주는 것’으로 실천했던 왕손이었다.


*저자 함성택 님은 서울대 문리대를 중퇴하고 대만국립대학교에서 사학과와 법학대학원을 수료하고 미국 네브라스카 주립대학교 대학원에서 미국사를 전공하였습니다. 현재 시카고 한미역사학회 회장이며, 시카고 한인문화회관에서 프로그램 디렉터와 역사박물관 관장으로 봉사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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